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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

심우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한 슌의 구겨진 얼굴에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깊게 그늘이 드러워진 채로 어이없어하는 그 얼굴을 보면서 놀림을 그칠 생각이 없던 자신인지라 그대로 농을 이어 나갔다.

 

" 몰랐는가, 자네 내 기둥 서방이질 않는가 "

" 몰랐네, 거절하겠네 "

 

성격 닮아서는 말도 간결하게 하며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이 역시나 슌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술잔에 남아져 있는 술을 마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표정을 감상하기에 여력이 없었다. 이 나이를 먹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가. 외형에서 풍기는 모습이 성격이나 그 사람의 인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단 말이 있듯이 슌의 무뚝뚝해 보이는 외형만큼이나 표정 변화가 없는 그였기에 슌이 이런 재밌는 표정을 짓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 우리 함께 지내온 세월이 얼마인데 이리 야박하게 구는가 "

" 세월의 문제가 아니네 "

 

오랜 벗의 진귀한 모습은 흥과 술의 맛을 돋구기에 충분했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슌의 귀한 표정을 감상하면서 술병에 손을 뻗어 비어져 있는 그의 잔을 가득 채우면서 그의 물음에 답을 늘어놓기 시작하기 위해 운을 띄었다.

 

" 슌, 자네는 내가 왜 자네를 좋아하는지 아는가 "

 

예의 무표정하지만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 슌의 표정을 보고 다소 아쉬운 기분이 들긴 하였지만 자신을 걱정하여 물음을 띄워준 죽마고우를 계속해서 놀리기엔 슌과의 관계가 너무나도 깊었다. 타인에게라면 말하지 않을 것들 이였겠지만 그 대상이 슌이기에 자신도 편하게 속내를 비추게 되는 것이리라.

 

" 자넨, 나에게 그 어떠한 책임감도 요구도 하지 않질 않는가. 자네가 날 걱정한다고 해서 나를 바꾸려 한다던가 자네의 기준으로 나를 맞추려 한다던가 하질 않네. 내가 흘러가는 대로 나를 보내면서도 이렇게 또 원할 때에는 함께 술잔을 기울어 주지 않는가. 자네는 나에게 있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벗이네. "

" ... 그런가 "

" 그러니, 내 자네를 기둥서방이라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가치를 다 하니 기둥서방이라 할 수밖에 없음세 "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슌에게 막판에 산통을 깨는 말을 붙이면서 자신의 술잔의 술을 이제서야 마저 비웠다. 물론 다른 이들과 같이 엄청난 표정 변화는 아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신중히 깊은 표정으로 들어주다 이윽고 변하는 그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의 변화가 그 어떤 술안주 보다도 맛있는 느낌이 들었기에 술맛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 즈한도 비슷하다 할 수 있네 "

 

대답을 회피하는 것 같았던 자신이 즈한의 이름을 입에 올려서 그런가,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알 수 없었을 만한 슌의 표정이었지만 제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표정이란 것은 자신이기에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나만 털리면 억울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미 자네의 과거는 내가 자다가도 외울정도로 다 알고 있으니 수지가 맞지 않은 장사 일세. 나와 약조 하나 해주시게나 "

" 어떤 것인가 "

" 어진에게 즈한은 공격치 말라 말해주게 "

" ... 그건 자네가 어진을 자극하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 "

" 그게 가능하다면 내 이리 살아왔겠나 "

" ... "

" 내가 어진에게 즈한을 공격하지 말라 한들, 오히려 더 잘됐다 하고 공격할게 뻔하지 않은가. 통제부 대장인 자네가 말을 한다면 자네의 체면을 봐서라도 안 할 가능성이 크다 생각 허네, 자네가 비록 평민 출신이라고는 하나 출중한 실력과 진중함으로 이 자리에 오른 사내인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 아니던가. "

" ... 말은 해보겠네만, 장담은 할 수 없네 "

 

말을 하는 중간, 마치 고약한 성격 머리 하고는 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며 한숨을 쉬는 슌의 표정이 보여 장난기가 발동하려는 것을 참고 말을 이었다. 오랜 벗에게 부리는 어리광은 성공적으로 통하였고 그가 어진에게 말을 해준다면 당분간만 일지라도 어진이 즈한을 공격하는 일은 없어지지 않을까 기대를 해보았다. 인간의 됨됨이가 글렀다 생각하면 상종 자체를 안 하는 어진이니 슌이 말하는 것은 최소한 듣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 우러나온 계획이었다. 

 

" 고맙네, 역시 자네 밖에 없을세. 역시 내 기둥서방일세 "

" 그 호칭은 빼게 "

" 하하하, 그건 이젠 무릴세. 그냥 적응하시게 "

 

기둥서방이란 말에 반응하는 슌의 얼굴이 너무나도 재밌기 때문에 무리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다행히도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은 슌의 호의에 안심을 하며 자신의 술잔에 스스로 술을 채워 따랐다. 

 

" 당연히 좋아하네, 좋아하지도 않는 자와 5년이나 같이 붙어 살기엔 내 성격상 무릴세 "

 

그리 말을 하곤, 비어진 슌의 잔에도 자신의 잔과 똑같이 술을 가득 따라 부었다. 가벼워지는 술병처럼 자신의 마음 또한 가벼워지면 좋으련만 그건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 보면은 애잔허네, 안타깝네 "

 

술을 마시지 않은채, 가득 따라진 술잔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술잔에 술이 가득찼을때 적당한 시기에 병을 떼지 않으면 넘쳐버리고 만다. 지금의 자신처럼.

 

" 나에게 어떤가 묻는다면, 꽃과도 같은 상대라 하겠네 "

 

눈을 감고서, 5년간 보아왔던 즈한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이제는 기억하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선명하게 각인된 그의 여러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라 눈을 감고 있는 것만으로도, 보지 않아도 그를 머릿속에 그려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 꽃이기에 꺽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는 걸세. 꽃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자네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그 어떤 요구와 책임을 묻지 않기에 이젠 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나에게 위로가 되는 그런 느낌일세 "

 

혼자서 떠드는 느낌이 머슥할 만도 하건만, 어느덧 같이 보낸 세월이 자신이 하는 헛소리라 할지라도 진중하게 들어주고 있단 것을 말하지 않아도 슌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기에 불편한 감정 따윈 없었다. 물론 자신은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끔찍이도 싫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속내를 물어봤다 하면 바로 그 날로 발 길을 끊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여도 아무것도 할 상대가 아니란 것을 이미 지난 세월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좋았다.

 

" 눈은 양상은 다르긴 하지만 어찌 보면 자네의 이마의 상처와 비슷허네 "

 

어느새 비워진 술잔을 든 손으로 슌의 이마를 가르키면서 이야길 이어 나갔다.

 

" 자네의 이마의 비록 흉이긴 하지만, 그것은 흉이 아니지 아니한가. 자네와 부인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표식이 아닌가. 언제나 자네의 그 흉터를 보면 부럽다네. 그리 살 수 있는 자네와 부인이 말일세 "

 

자신의 실수로 인해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즈한을 감싸다 날아간 눈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 비슷하긴 했다. 그리고 슌에게 부럽다 말하는 것은 정말로 진심이었다. 예전 슌의 이마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말한 것이었지만 부인과 맺어지는 과정에 생긴 그 흉터가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각자의 입장은 달랐지만 서로 사랑하였기에 생긴 상처이고, 결국 둘은 맺어져 이리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그 반듯함과 서로를 향한 올곧은 마음이 자신에겐 없는 것들이라 가히 부러울만했다. 어느덧 술잔을 기울이던 것을 멈추고 있는 슌이 신경쓰여 다른 손으로 술을 마시라는 듯이 빈 손으로 술잔을 마시는 시늉을 하면서 슌의 음주를 재촉하였다.

 

" 그것은 애(愛)인가 "

 

슌의 짧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물어볼 법한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항상 웃고 있던 눈을 뜨고선 슌을 마주 쳐다보다 가볍게 한 숨을 쉬고선 비어져 있는 자신의 잔에 술을 마저 채워 넣었다.

 

" 난 말 이세, 관계에서의 책임이 싫을세 "

 

그리고선 술을 마시지 않은 채, 술잔을 바라보다 다시 웃었다.

 

" 내가 아주 어릴 적, 내 어미는 가문의 뒤를 잇게 하기 위해서 재능이 없던 내 형을 죽었네. 식에 약을 타서 천천히 말일세. 내 아비에게는 나 말고도 자식이 여섯이나 더 있었으니 그나마 재능이 많았던 나에게 가주를 잇게 하고 싶으셨던 거 같네. 그러나 어미는 나에게 그리 모진 사람이 아니었네. 나에겐 한 없이 다정하신 분이셨지. 나를 아주 사랑하셨네 "

 

자신의 재촉에도 요지부동으로 술잔을 입에 대지도 않은 채 계속해 그 칠흑 같은 검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슌의 모습을 보니 이야기를 하다 쓸데없는 이야기라 생각하여 말을 말려다가도 마음 편히 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침묵으로 일관해주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편하였기에 오랜 벗의 배려에 기대어간다는 느낌으로 퀴퀴한 이야기의 보따리를 다시 풀어놓았다.

 

" 내 첫사랑은 우리 집 시녀였을 세. 당연히 지극히 아꼈고 어여삐 여겼네. 어느 날 그 아이가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사람의 발 길이 끊어진듯한 험한 강가에 살해되어 버려져 있었네. 누군가 나에게 말하지 않아도, 그 아이를 죽인 것은 우리 가문이란 것을 알 수가 있었네 "

 

오래된 이야기지만 마치 어제의 일처럼 떠오르는 향수들이 마음속에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슌의 움직이지 않는 채워진 술잔을 바라보면서 묵묵히 말을 이어 갔다.

 

" 어렸을 적엔 정말 동무가 많았네. 스스럼없이, 격식 없이 어울릴 수 있던 시절이 있었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가 되어 있던 게 아니던가. 가문의 입장에서는 씨의 출처도 알 수가 없고 천한 것들과 어울리는 내가 못마땅했겠지. 하지만 말일세 가문은 정말 날 사랑했네. 끔찍이도 아꼈지. 정확히는 재능이 있는 나를 사랑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것도 사랑이었네 "

 

그렇게 말하고선 자신의 손에 쥐어진 비어진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슌과 같이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 자네에게만 말했다시피, 가문에서 맺어 주었던 정혼자도 나쁘지 않은 상대였네. 그녀를 사랑했었지. 하지만 그녀는 능력이 출중하고 앞으로 뻗어 나가고 싶은 사람이었네. 나와 결혼하게 된다면 우리 가문에 휘둘려 평생을 살게 될 것이 뻔하였네.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놔달라고 하는데 어느 누가 보낼 수가 없겠는가. 내 나름의 방식으로 그녀를 놓아주었네 "

 

이 세상 하늘 아래, 누가 사연 없이 살아가겠는가. 사연 없는 무덤이 어딨겠는가. 자신에게도 이유는 있었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 그렇게 나는 가문에서 오냐오냐 자라난 망나니로, 바람피우다가 정략결혼까지 파기시킨 능력 하나만 믿고 오만방자하게 살아가는 한량 같은 사람이 되었네 "

 

다시 한번, 슌의 이마에 있는 그 자랑스러운 흉을 바라보면서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웃었다.

 

" 내가 왜 자네의 상처를 부러워하는지 이제는 이해가 되는가 "

" ... 대충은 그렇네 "

 

슌의 대답을 듣고선, 비워진 자신의 술잔에 다시 한번 술을 가득 채워넣어 잔을 들었다. 그리고선 팔을 뻗어 슌에게 서로의 잔을 부딪히기를 재촉하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야기를 하는 자신을 계속해서 말 없이 바라보던 그가 멈췄던 잔을 들어 부딪혀 주자 적막한 방 안에 고운 도자기들이 쨍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울러 퍼졌다.

 

" 자네의 걱정에 충분한 대답이 되었길 바라네 "

 

그렇게 말을 하고는 오랜 벗과 함께 다시 한 번 술잔을 기울였다.

 

" 그러고 보니, 자네 첫째 아들은 이 곳에 올 생각이 없는가 "

 

볼 일이 마쳐지기가 무섭게, 화제를 전환하여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혹여라도 슌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꺼낸다거나 위로를 던진다던가 하면 곤란하기에 적절한 소재를 찾은 것이다.

 

" ... 음? 그건 왜 묻는 건가 "

" 첫째가 자네와 완전 판박이지 않은가. 내 온다면 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일세 "

" 뭔가 "

" 자네의 아들과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자네가 회춘했다고 뻥을 치고 다니고 싶어서 말일세. 누구라도 그 아이를 본다면 그리 믿을 걸세. 마침 나와 같이 일하는 여인 하나가 굉장히 순진무구하여 그런 농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속는지라 반응을 본다면 굉장히 재밌을 거 같아서 말일세 "

 

오늘따라 슌의 머리 위에 내 성격을 지적하는 듯한 생각이 달려 있을 것만 같은 표정을 많이 보게 되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 다시 술맛이 돌아옴이 느껴져 즐거웠다. 자신의 말에 한숨으로 대신 답변하는 슌을 보니 하지 말라 이야길 해도 할 것이란 걸 알고 있단 거겠지.

 

" 부인과 언제 한 번 올지도 모르겠네만은 적당히 하게 "

" 알겠네, 알겠네~ "

 

무심한 듯하면서도, 자신의 터무니없는 행동에도 맞추어 주는 그의 모습이 오늘따라 고마웠기에 평소 잘 표현 안 하던 말도 입에 담아보았다. 

 

" 언제나 자네에겐 고맙네. 알고 있어 주게나 "

 

입에 술잔을 갖다 댄 채로 자신의 입에서 답지 않은 의외의 말이 나오더라도 놀라는 기색 없이 바라봐주는 오랜 벗이기에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마냥 주절주절 이야기할 수 있었다.

 

" 알고 있네 "

 

그 짧은 말이 얼마나 위안이 되던지.

 

다시 돌아온 여유를 만끽하며 머릿속에서 잡다한 이야깃거리 소재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비워져 가는 술병만큼이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아쉬울 만큼 즐거운 시간이 무르익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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