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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

반쪽

 

 

 

 




정신이 들었을 땐, 흐릿한 시야 사이로 늘 보던 익숙하고 편안한 천장이 아닌 낯선 곳의 천장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은근하게 풍기는 약재 냄새와 아련히 들리는 빗소리, 그리고 더불어서 멀리 들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자신이 신세 지고 있는 즈한의 집이 아님을 직감하게 한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로 이송이 된 거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던 찰나 곧이어 느껴지는 한쪽 눈의 통증으로 인하여 생각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한쪽밖에 보이지 않는 흐릿한 시야.

평소에 자신이 알던 감각이 아닌 다른 느낌이 느껴지는 한 쪽 눈. 타는 듯한 통증과 더불어 깨질 듯이 아파오는 머리가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 뒤늦게 인지가 되기 시작한다. 전체적인 사지의 감각은 심각할 정도로 둔탁하게 느껴지는데 눈의 통증만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딱히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이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통증과는 다르게 몽롱한 머릿속을 움직여 무슨 일이 있었는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 날도 평소와 다름이 없던 날 일 줄만 알았다. 


본인이 심하게 일을 하지 않은 탓에, 어진이 찾아온 그 날.  
별 다른 일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일이 일어나면 항상 겹치기 마련이요, 실수는 하나로 그치지 않는 법이었다.  


즈한에게 손님상을 부탁하면서 그를 부엌에 보내 둔 뒤 어느 때와 다름없이 어진과 티격태격하면서 무료함을 달래던 도중 신이나 버리는 바람에 어진의 가문과 과거 이야기를 꺼내면서 극도로 긁어버린 것 또한 지금 생각해보자면 화근이긴 화근 이었을 것이다. 어쩌겠는가, 슌에게도 말한 적이 있지만 어진이 화를 낼 때 이미 흘러간 청춘이 돌아온 것 마냥 즐겁고 재밌게 느껴지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하지만 가장 큰 화근은 역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만심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진의 화살 세례가 시작되고 나서야 이 곳이 즈한의 집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첫 번째 실수였다. 나이를 먹으니 노망이 났는가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있던 장소를 망각하다니. 자신 한 몸이라면 당연히 문제가 될 것이 없었기에 몸속 깊이 찌든 실력에 대한 자만심이었다. 어진의 공격은 자신의 능력으로 상쇄시킬 수 있기에, 밖이라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기에, 그 자만심이 쉬이 조심성을 불러오기엔 어려웠던 것이 실책의 원인이었으리라.

문제는 즈한과 5년 동안 살면서 이 집에 많은 정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꽃처럼 생각하는 즈한의 손길이 닿은 집안 가재들이 바스러지고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들이 아까웠기 때문에. 자신이 능력을 제대로 써서 어진의 공격을 상쇄시키면 자신의 손으로 즈한의 흔적을 망가트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격이라 그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화살이 꽂히는 것과 바람으로 풍비박산이 되는 것은 규모 자체도 다르다. 

이어지는 두 번째 실수는 적당히 빗발치는 화살을 피하다 살림살이 파괴를 최소화 해보겠답시고 부엌으로 숨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으리라. 부엌으로 숨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부엌을 건너 뒤 쪽으로 돌아가 그쪽 지붕에서 어진을 상대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지붕의 기왓장이라면 즈한의 손길이 덜 닿은 곳이니 보수 공사를 해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 하였고, 그 와중 부엌이 일시적으로 망가진다 하더라도 밖에서 식을 해결하면 될 일이니 괜찮지 않을까 한 것이다. 다른 곳은 즈한이 생활하는 곳이라 선택지의 폭이 좁았다. 


나름 머리를 쓴다고 썼는데, 나이 들면 죽어야 한다고 했던가.  
연이은 실수에 따른 댓가는 생각보다 컸다.  


부엌에 있는 즈한을 보자마자 사고가 굳었다. 


일전 즈한을 감싸다 어진의 활을 두 어대 맞은 적이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어진이 즈한을 신경 쓰지 않고 쏜다는 것을. 그 원인은 자신이 애지중지 아끼는 집주인이었기도 하지만 즈한의 상태를 알고, 또한 즈한의 무능함을 좋아하지 않는 어진인지라 그의 생에 대한 경중을 생각지 않고 활을 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피신시켜놨던 것이었는데... 그것을 깜빡하고 말아 버린 것이다. 

어진의 성격상 자신의 집이 아니라 할 지라도 이 정도로 화가 올라왔으면 부엌문이 부서지던 말건간에 문 너머의 자신을 맞출 기세로 활을 쏠 것이 분명했다. 자기 분을 잘 삭이는 어진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분이 삭혀지기도 전에 즈한과 자신이 있는 부엌으로 화살이 들이닥치는 게 먼저 일 것이다. 이 거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쓰게 되면 특히나 좁은 부엌이기에 집안 가재들이 부서져 그 잔해들로 즈한이 다칠 수도 있다. 길게 고민할 겨를도 없이 화살 하나가 부엌문을 뚫고 맹렬한 기세로 벽에 꽂혔다. 

어진의 활은 빠르고, 매섭기 때문에 연이은 화살이 곧 들이 닥치리란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다음은 뭐라 말할 것도 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즈한을 감싸기 위해서 그를 자신의 품에 안았고, 그를 안기가 무섭게 자신의 뒤통수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루어 말하기 어려운 감각이 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어진의 화살을 맞은 적은 한 번 아니라 그 감각을 당연히 알 법도 하건만, 머리에 꽂히는 화살과 몸통에 꽂히는 화살이 감각이 같을 순 없을 것이리라 이해가 된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격렬한 통증이 번지기도 전, 자신의 한 쪽 얼굴이 무언가의 액체들로 덮이는 느낌이 들면서 자신의 품 안에 안고 있던 즈한을 내려다본 기억은 난다.  





안겨 있기에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언제나와 같았기에. 

' 이 옷에 얼룩이 지면 아까울터인데....'



-를 끝으로.

자신의 기억이 끊겼음을 알 수 있었다. 





한쪽 밖에 남지 않은 시야를 천천히 굴려 생각을 마무리 했다. 결론을 내려보자면 뒤통수에 화살이 꽂혀서 한 쪽 눈 또한 날아가게 된 거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눈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보통 이 정도가 되면 죽고도 남았을 텐데 살아 있는 것이 용한 것이었다. 몸이 이렇다 보니 자신의 상황을 봤을 때 얼마나 누워 있었는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가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긴 명줄에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입안은 쓰기만 했다. 말장난과 거듭된 실수가 불러온 대가가 한쪽 눈의 영구 실명이라니, 자업자득이라 생각을 하지만 하마터면 생이 날아갔을지도 몰랐을 상황에 아찔하기는커녕 앞 일에 대한 번거로움이 먼저 밀려와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나 사지의 감각또한 흐리멍텅하여 안심 할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는 머리를 다쳐서 사지가 둔해진 것인지, 아니면 치료로 인해서 일시적으로 둔해진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누워만 있어서 둔해진 것인지 판단키 어려웠다. 사지라도 멀쩡해야 할 터인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봤다. 

이어서 생각을 해보자면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 죽이려면 그 당시에 죽일 수 있었을 터인데 즈한과 자신을 죽이지 않은 어진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순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 명줄을 부지하고서 눈을 뜬 거 보면 그 뒤로 공격을 한 거 같진 않다. 아마도 자신을 별 다른 사유 없이 죽이게 되면 황제께 고하는 과정이 번거로울 테니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그래도 재밌는 사람임은 분명했다. 몸을 일으키는 와중에 한쪽 어깨에 통증이 뒤늦게서야 올라오는 걸 보니 아마 뒤통수가 뚫리고도 한 발 더 날아와 맞았던 거 같다. 부엌 사정을 몰랐을 터이니 쏜 것이야 하겠지만은 여전히 성질머리 하고는... 이란 생각이 들어 웃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쉽사리 도와주질 않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면서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까지는 주변에 사람이 없고, 자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없다. 

지금은 몸의 상황도, 정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마주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평소 태도대로 대할 수 있을지 그것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상태였다. 더욱이나 생면부지인 인간들에게 자신의 나약한 모습 따위를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거니와 이걸 빌미로 귀찮은 일이나 후에 있을 귀찮은 것들에 대한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일어나 창문을 여니, 그리 거세진 않은 비가 계속해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몸 상태가 만신창이에 가깝고 비에 젖는다 하더라도 이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탈출은 자신으로써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어딘지 모르는 것을 말없이 빠져나와 발걸음을 옮겼다.














빗 속을 걸으며, 어디로 발걸음을 향해야 할지를 정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럴 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본래 지정받았던 거주지로 돌아가긴 싫었다. 이 사단이 났는데, 본가에서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을 것이며 귀찮은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제 집에 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평소 도망 다니던 행선지들을 머릿속에서 기억해내 순차적으로 들렀다. 물론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평소보단 느릿한 발걸음 들이였지만 다행히도 비 덕분에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적어 그리 어렵지 아니하였으므로 나름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얼마 전 바뀌는 계절 때문에 점점 더 추워지기에 자신이 잘 때 쓰는 검은 잠옷의 여벌을 주문해놓은 곳이 있었기에 그곳에 먼저 들러 자신의 새 옷부터 챙겼다. 대체 어느 놈들이 입혀 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거지 몰골의 이런 환자복이라니 죽어도 입기 싫었다. 잠옷을 챙긴 뒤엔 혹시나 모를 사태로 인한(※순전히 위험한 레저스포츠(?)를 즐기는 취미 생활 때문에) 도망자 생활을 대비하여 여기저기에 쪼개 놓았던 자신의 짐들이 있는 민간인들 집 중 두 어곳을 추가적으로 들렀다. 한 곳은 가면을 만드는 곳이요, 한 곳은 자신의 생필품 중 일부를 맡겨 둔 곳이었다. 다행히 생필품을 맡겨둔 곳은 주막이었기에 그곳을 마지막으로 방을 하나 잡아 들어가 앉았다.

젖은 옷을 자신의 새 잠옷으로 바꿔 입고, 주모에게 일러 방에 자신의 짐과 함께 거울 하나와 붕대를 가져다 달라하였다. 아무래도 상처에 빗물이 들어간 것이 좋을 거 같지는 않기에 스스로 붕대를 갈기 위함이었다. 부탁한 것들이 도착하고 간단하게 짐을 풀어놓은 뒤 거울을 보고 젖은 붕대를 풀러 내었다.

빗물과 피, 진물이 늘러 붙어 있는 붕대를 걷어내자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눈이 있었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 어떤 것도 비추지 못하는 제 기능을 잃은 공허한 구멍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것이고 그것에 휘말린 즈한을 지키다 일어난 일이니 불만은 없었다. 단지 관리 하기가 불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심지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사지 멀쩡히 살아난 것만으로도 정말 천운이 아니던가.

그리 생각을 하면서 묵묵히 새 붕대로 자신의 얼굴과 머리를 잘 여며 맨 뒤 풀러 진 짐 안에서 검은색의 작은 함을 들었다. 뚜껑을 여니 다행히도 그 안에는 지난날 자신이 챙겨두었던 아편이 들어 있었다. 이 아편을 숨기기 위해서 생필품들을 위장용으로 넣어둔 것이라 주모 조차도 그 목적을 알 순 없었을 것이다. 고지식한 다른 대장 나리들이 마약을 평화구역 내에 들여오게 해 줄 것도 아녔거니와 나라에서 지원을 받는 곳이다 보니 더욱이나 마약 밀수입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리하여 본인이 몰래 사람에게 웃돈을 주어 자신이 쓸 요량으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숨겨둔 것이었다. 물론 흡연을 하기 위한 액체형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편말 또한 있었다. 일반적인 약재로는 견디기 어려운 정도의 통증이란 것은 몸으로 지금 실시간으로 체감 중이기 때문에 아편에 기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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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메 간만에 오신다 하셨더니 어딜 그리 가시예 눈 한짝도 마 성치 않으신거 같으신디 "

으례 쓰던 가면을 쓰고 방을 걸어 나오자 익숙한 목소리의 주모가 자신을 아는 체 하는 것이 느껴졌다. 몸 상태는 좋지 않지만 자신이 원래 입던 것과 같은 옷과 가면까지 쓰니 그것들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은 생각보다 컸다. 

" 걱정 말게나, 금방 나을 걸세. 내 지금은 돈을 갖고 오지 않았으니 내가 미리 맡겨둔 금액에서 원하는 만큼 차감하게나. 이번 달 말일에 다시 와 웃돈을 좀 더 드림세 "

" 하이고마 그리 해주시믄 늘 감사하지예. 글칸다 해도 지는 걱정이 되는디, 식사라도 하고 가심이 어떠하시예 "

" 알아 챙겨 먹겠네, 내 여기 온 것은 언제나와 같이 비밀로 해줌세. 그럼 있다 들르겠네 "



워낙 피곤한지라 지금의 상태로는 주모의 주책이 마냥 달갑지는 않지만, 자신의 짐을 뒤 적 기리지 않을 됨됨이의 사람을 다시 구하는 것은 번거로웠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렇게 주막을 뒤로한 채로 발걸음을 다시 또 옮겼다. 

어느새 비가 그친 하늘은 맑게 개여 해는 아니더라도, 하얗고 처연한 초승달을 밤하늘에 띄우고 있었다. 주모에게 들으니 자신이 기절한 사이 흘러간 시간은 이주 남짓. 그 말은 이주 동안 즈한을 돌봐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된다. 물론 처음에는 자신이 즈한의 노동력과 생활살이에 묻어갈 요량으로 제 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하루 중 일부를 그를 챙기는데 시간을 기꺼이 쓰고 있는 제 자신이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능력을 사용해 조용히 발자취를 감추며 이동을 하였다. 아편 덕분에 진통이 마비가 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제 옷차림으로 돌아와 그런 것인지 어쨌든 간에 가면을 쓴 시점에서는 정말 평소와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이 가면을 쓰고 있으면 새카만 어둠뿐일 뿐 앞이 보이질 않는다. 그렇기에 미미한 바람을 이용하여 물체가 있는 위치와 거리를 측정하여 돌아다닌다.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목소리와 체향으로 구분을 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는지라 눈 하나가 보이지 않아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냥 그리 느껴졌다. 그렇게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나라에서 지정받은 자신의 거주지가 아닌, 남의 집 이긴 하였지만 이제는 나름 자신의 집 같아지기도 한 그의 집으로 발자취를 이어 나갔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지붕에 내려앉았다. 코 끝에 이미 수십 번도 더 맡아봤을 익숙한 냄새와 마치 자신이 꽃과도 생각하는 그와 닮은 조용한 적막이 흐르는 곳에 도착하고서야 진정으로 마음이 놓였다. 마치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히 언제나와 같은 그런 느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다쳤다고는 하지만, 일순간 스스로가 노망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실수도 하긴 했지만 정신을 놓진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뒤니 어쨌든 간에 아무리 뻔뻔한 자신이라고 해도 신경이 쓰이진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이 곳에서 내려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녀왔다고 인사를 하고 싶지만 그리 할 수 없었다. 제 상황이 그리 좋지 않기에 자신이 예측한 것과 다른 반응이 나오면 이후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여유를 잃어버리는 것이 싫었다.

항상 하늘을 벗 삼아 날아다니는 자신이기에 상공의 추움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높은 하늘이 아니라 할지라도 지붕에 오래 앉아 있으면 추워지는 것은 누구라도 당연히 알 것이다. 하지만 그런 추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아편 때문이겠지만 그것보다도 이 지붕 아래 누가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심리적 안정감이 작용되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으리라.



아직, 시간이 일러 그가 잠자리에 들 시각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붕에서 하늘에 떠 있는 그를 닮은 손톱 달을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깊은 시각. 저 멀리 주변의 집들의 촛불이 하나둘씩 꺼져가며 온 주변이 하늘을 제외하고는 깊은 어둠에 잠긴듯한 새벽의 모습에 그제야 지붕이 아닌, 그의 집에 발을 내려놓았다.

아래로 내려오니 한층 더 정겨운 냄새가 자신을 기쁘게 했다. 익숙한 단풍나무의 향, 풀내음, 중앙의 연못이 피어내는 물의 냄새, 기와의 먼지 냄새가 아닌 집에서 나는 옻칠 향과 갖은 나무의 냄새. 그리고 즈한이 쓰는 종이와 먹의 냄새까지 모든 것이 반가웠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이 집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자신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을 느끼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즈한이 어디에 있는가는 말하지 않아도 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닫히지 않은 집무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자신의 발걸음을 잡아 끄는 듯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집무실에서 그대로 쓰러지듯 잠에 빠져 있는, 오늘 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토록 얼굴 한 번이라도 봤으면... 하고 생각하였던 그 얼굴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아무데서나 잠에 빠져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느낌이었다. 그대로 말없이 즈한에게로 다가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평상복을 입고 있어 자는 것이 불편할 텐데도 곤히 잠에 빠져 있는 그 모습이 평소 자신이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 같아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 되었다.

그대로 집무실을 넘어, 침실로 그를 데려갔다. 잠에서 깰까 우려가 되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의 침상에 눕힌 뒤 침상 옆의 커다랗고 큰 동그란 원형의 창문을 살며시 닫았다. 이리 자면 불편할 터이지만 그래도 옷을 벗기다 잠에서 깨게 하고 싶지 않았고 집무실에서 그대로 잠드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물론 그리 잠들어 다음날 온몸이 피곤하고 삭신이 쑤셔도 그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묵묵히 하루를 보낼 즈한이였기에 간간히 챙기는 것은 본인이 하는 것이 되려 마음이 편한 것이었다.

문단속과 창문 단속이 제대로 되지 않은 탓에 냉한 집안의 기운이 그에게 다시 고뿔이라도 찾아올까 우려되어 머리를 뉘이고 있는 베개를 다시 자리 잡아 제대로 잡아주곤, 자신의 옷이 있을 곳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잠옷에는 그런 기능은 없지만, 평상시에 자신이 입고 다니는 붉은색의 옷과 망토에는 어느 정도 보온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일단 옷이 무거우면 날아다닐 때 번거롭기 때문에 고액의 돈을 쥐어주고 만든 옷이었다.

이불을 덮어 주긴 하였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자신이 왔다 갔다는 것 정도는 즈한에게 알리고 싶었기에 그의 이불 위에 자신의 겉옷과 망토를 겹쳐 덮어 주었다. 어두운 방안 집무실에서 들어오는 미미한 촛불의 빛이 그리 밝진 않기에 집무실과 침실이 이어지는 곳의 문을 소리가 안 나게 조심스럽게 닫고는 촛대에 불을 붙였다. 이리 해두는 것은 냉기가 조금이라도 덜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과 더불어 즈한이 잠에서 깨었을 때 어둠에 헤매지 않도록 해두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집에 있었더라면 잘 시각 쯔음 같이 문들을 단속하고 이미 촛불을 켜놓았을 시각 이건만, 이제야 평소 하던 것을 하게 된 것에 마냥 입이 썼다. 



소소하게 제 할 일을 마치고 나서야 한숨 돌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작은 촛불 하나가 켜진 방 안에서, 우두커니 앉아 침상에 바르게 누워 있는 즈한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냥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단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졌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일 뿐,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기에 그리 어둠 속에서 계속해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이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잠식해오는 것이 느껴져 와 잠깐의 갈등을 했다.

혹시나 그가 깨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되긴 하였지만, 지금 가면 또 며칠 아니 몇 주 뒤에나 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욕심에 이불 안에 가지런히 뉘어 두었던 그의 두 손 중, 한 손을 아가 다루듯 정말 조심스럽게 잡아 밖으로 빼내었다. 그리고선 그의 한 손에 나 있는 상처 하나, 하나를 자신의 검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 있지 않은가, 즈한 "



불러도, 당연히 대답이 없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받지 못할 편지를 보내 듯한 느낌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 내 이리 되고 나서 드는 생각이, 이리 아프고 번거로운데 자네는 이런 상황이 되었어도 그 아픔 조차 느끼지 못했을 거란 것에 대한 안쓰러움이 드네 "



그렇게 한 손을 어루어 만지면서 어둠 속에 드러나 있는 그의 자상이 가득한 한쪽 눈을 바라보았다. 물론 자신이 꽃과도 같이 생각하는 즈한의 미모였기 때문에 그의 몸에 나 있는 상처마져도 고혹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긴 하였으나, 그것이 상처가 있어 아름다워 좋았다기 보다는 즈한의 미모가 빼어난 탓에 그것 또한 좋아 보이는 것이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애잔함으로 변질되어 버린 시각이었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물론 몸이 회복되지 않은 탓이 크기야 하겠지만 한쪽만이 남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피곤한 일이었다. 오늘따라 그가 지나왔을 삶에 대한 고달픈 길이 그토록 구슬프고 애가 닳는 느낌이 넘쳐나 평소라면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잡념들이 깊어졌다.

사람과 정이 든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모든 우호적인 관계에서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것이 관계의 깊이에 따라 책임의 경중이 달라진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다 생각한다. 자신은 그토록 그 책임감이 싫었고, 그렇기에 늘 혼자 있는 것이 편했다. 그리하면 고독감도 외로움도 그저 자신의 하나 것만, 딱 그 하나만 해결을 하면 되는 인생이었다. 누군가의 삶과 누군가의 감정을 공유하고 버티기엔 자신의 그릇이 너무나도 작았다. 그렇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대로 두고 흘러가는 것이 가장 좋다 생각하며 그리 살아왔기에 그것이 익숙하였다. 하지만 자신도 인간 인지라 이기적인 모순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고독감이 결국 사람의 정을 찾기 마련이었고 그것을 충족하기엔 즈한이 최적의 상대였다. 

자신이 무얼 하던 간섭하지 않고, 자신이 무엇을 말하던 상처 받지 않고,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도, 책임도, 강요도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며 감정을 요구하지 조차도 아니하고 그저 마치 꽃과도 같이 홀로 있는 그 모습이. 비록 그것이 그의 삶이 황폐화 되어 망가져버린 것에 대한 흉터와도 같은 흔적일지라도.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고 숨통이 틔이는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즈한의 앞에서는 자신이 세상 앞에서 늘 도망만 다닌 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


5년 동안, 적지 않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눈을 감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리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선명하게 지난날들을 그려낼 수가 있다.



처음 이 곳으로 왔을 때의 즈한의 얼굴.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던 그 고운 자태.

집무실에서 문서에 붓을 들고 업무를 하고 있을 때면 한 폭의 수묵화 보다도 아름다웠던 그 모습.

본인의 얼굴을 자신의 무릎에 눕힌 채 업무를 하던 그 날에도, 

즈한의 옷을 입어 보고 싶다며 장난을 친 자신에게 망토를 벗어주며 앞 여밈새를 곱게 만지던 모습도,

함께 체스를 두던 황금 같았던 그 날의 오후도, 

마치 어린애 마냥 제 가면을 쓰던 그 모습도, 

그 뒤 화관을 쓰고 세상 그 어떤 꽃보다도 어여삐 피었던 그 날에도,

제가 옮겨버린 고뿔에 앓던 와중에도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자신의 애를 태웠던 그 날에도,

자신이 주는 쓴 한약도 아무런 말 없이 잘 받아먹던 그 모습도,

한가로운 날 장난스럽게 만든 간이침대에 같이 누어 제게 기대었던 그 모습도,

등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밤하늘 아래 흘러가는 연꽃등 보다도 더 애처롭게 빛나던 그 모습도.

언제나 같은 그 모습으로, 자신이 원할 때에 옆에 있어 주었기에 어느새 자신의 마음속에 뿌리 깊게 내려앉아 영원히 지지 않을 만년초를 피우게 해 준 자신의 꽃과도 같은 그였다.



영원히 꽃이 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샌가 꽃은 조금씩, 조금씩 사람이 되어 갔고 그것이 한 편으론 기쁘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음속 한 켠에 두려움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언젠가는 보내야 할 터인데 라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한 번 펼쳐진 욕심과 이기심은 쉽게 접히질 않았다.



" ... 자네는 내가 귀찮지 않은가 "



대답이 없을 것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그냥 그리 물어보고 싶었다. 그의 손을 살며시 뒤집어 손바닥을 보이게 한 채로, 그대로 조용히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대었다. 침상에 반듯히 눕혀져 있는 그의 손의 온기가 자신의 다치지 않은 눈가와 볼에 닿자 슬슬 떨어져 가는 아편의 효과가 다시 충전이 된 듯 눈과 머리의 아픔이 가라앉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알고 있다. 자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을. 그렇기에 늘 사고만 치고 다니고 문제의 원흉이 되기 십상이란 것도 알고 있다. 심지어 이번 일은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평생 마음의 흉으로 질만한 하였기에, 즈한이라면 자신이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성적으로는 이해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기울어진 걱정의 잔은 그 그릇이 다 흘러넘쳐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멈출 수가 없는 법이었다.



" 자네가... "



언제 다시 올지 모르기에 조금 더 욕심을 내어 그의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지그시 누르듯 더욱 갖다 대고는 그의 온기를 느꼈다.



" 자네가 괜찮다고 해주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것만 같을터인데... "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자신을 옭아매는 이러한 잡념도. 모두.



그대로 눈을 감고서.

조금이라도 이 순간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으면서 시간마저도 멈춰버린 듯한 적막 속에서 즈한의 작은 숨소리, 손의 온기, 자고 있는 그의 모습,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그의 체향마저도 모든 것을 담듯이 자신 안에 새겨 넣었다.



" ...내, 낫거든 어여 돌아오겠네 "



이제는 어느덧 닮아버린 반쪽의 눈으로 하릴없이 바라보다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집무실의 미쳐 끄지 못한 촛대의 촛농이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흘렀는가를 가늠케 해 주었다. 그대로 집무실의 초를 끄고, 집 주변을 돌아다니며 문단속을 하였다. 물론, 몇 시간 뒤면 즈한이 일어나 다시 열기야 하겠지만은 그 시간 동안 집이 더 이상 냉해지는 것도 좋지 않기 때문에 원래라면 둘이 했을 것을 혼자 마치고 나서야 그의 집을 나서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비를 맞고 돌아다니고, 아편의 효과로 그나마 버틸 수 있었기에 서둘러 주막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거 같았다. 몸의 상태가 위험신호를 보내는 것을 보았을 때 돌아가는 길이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생각 마냥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아 점점 어슴프레 새파랗고 차가운 색으로 변하면서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즈한의 집 이곳저곳을 멍하니 바라보다 예의 눌러쓰던 그 새카만 가면을 눌러쓰고 담벼락을 넘었다.

인적이 없는 길가, 돌아가는 길의 자신의 긴 한숨만이 말없이 허공으로 흩날려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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