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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

동백꽃 [소설 백업본]

http://wowpriest.dothome.co.kr/sinsa/camellia.html

-캘라그라피는 샤엘님 커미션
-페이지는 칠면조님이 작업해주심!ㅠㅠS2
-아래는 소설 백업본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까닭에 제 색을 띠지 못하는 세상 모든 만물들이 그 시린 색상만큼이나 온기를 잃어버린 듯 어둠 속에서 차갑게 존재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까지 얼어붙일 마냥 끝을 모르고 차가워져 가는 매서운 한기를 대변해주듯 그 전날 내려 소복하게 쌓인 눈들이 삭막한 새벽녘의 전경을 더욱 시려 보이도록 도왔다.

어둠의 장막이 샛푸른 빛깔로 바뀌어져 가는 그 시각. 전날의 일로 인해서 수면이 어그러졌던 탓인지 눈이 떠진 까닭에 이제는 익숙해진 한쪽만은 남은 시야를 느리게 움직이며 눈을 깜빡여 보았다. 평소보다 더욱 수분이 없는 눈은 마치 모래가 들어간 마냥 바싹 마르고 껄끄럽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뻑뻑해진 한쪽 눈을 손으로 주변을 매만지며 습관적으로 주변 상황을 살피기 위하여 귀를 기울였다.

마치 지금까지도 눈이 오고 있었다면 소복하게 쌓이는 눈꽃송이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아무런 잡소리가 없는 고요한 적막.

그 속에 아주 얕게 그리고 느리게 숨을 쉬고 있는 즈한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말로 작은 그 소리는 이토록 조용한 환경이 아니었으면 듣지도 못했으리라. 그 정도로 즈한의 집은 시끄러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멀어져 있었기에 그의 상태를 관찰하는 데 있어 몹시 편안하고 좋았기에 썩 마음에 들었었다.

그가 다루는 까만 어둠에 잠긴 듯 무표정한 얼굴로 침상에 잠에 들어져 있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독특하게 숨 쉬는 방법 때문에 느릿하게 오르내리락 하는 가슴을 보면서 평소보다 뻑뻑한 제 눈도 느리게 꿈뻑였다. 한참을 숨을 안 쉬다가 숨 한 번 쉬고 다시 또 그리 한참을 안 쉬다가 숨 한번 쉬고, 그 호흡법이 즈한의 애석한 과거의 잔재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조용한 적막이 찾아와 그가 호흡하는 모습을 마주하게 될 때면 누군가 가슴 한 구석을 한 조각 한 조각씩 잡아 뜯어내고 있는 듯한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자신을 찾아왔다.

항상 그가 먼저 일어나 하루를 보낼 채비를 하러 침상에서 발을 내릴 때 쯔음에 일어나던 것이 제 쪽이었기에 자신이 먼저 일어난 것을 보면 아직 그가 일어날 시간은 되지 않은 듯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그가 조금이라도 더 따뜻이, 평온하게 잠을 청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온기가 담긴 검은 이불을 침상 위로 덮어줬다. 본인이 일어날 시간이 되기 전엔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그 인지라 이불의 무게가 두꺼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깨지 않았다.

자신의 이불이 덮인 채 자고 있는 모습이 새삼 언제 바라봐도 아름답고 어여쁘기 그지없어 잠든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고 싶기야 하였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그 하얗고 청아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복잡하게 엉킨 제 생각을 풀어내는데 방해될 것만 같았다. 평소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잦은 시름이 잠기는 느낌이었지만 지금 자신의 정신이 이토록 엉키게 되어 버린 원인은 즈한이였기에 그리 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곤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그의 수면을 방해치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 푸른 새벽녘에 잔뜩 온기와 색상을 빼앗겨 성이 난 듯한 호두나무 목재로 이루어진 나무판이 발이 닿기가 무섭게 제 온기를 뺏아댔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마치 살갗 아래 혈관들의 온기마저도 모조리 다 뺏어갈 생각인지 발끝부터 스며 들어오는 한기가 몸을 빠르게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삐걱대는 나뭇판들의 소리처럼 제 마음도 삐걱이고 있기에 추위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평소에 입던 나가는 옷차림새가 아닌 잠옷 차림 그대로 밖으로 나왔으니 맨 발인 것이 당연하기야 하겠지만, 정신이 팔려 있는 까닭에 밀려오는 한기를 어떻게 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나뭇 판들을 밟고 나와 퍼런색으로 물들여진 눈들이 소복이 쌓여 있는 길 위에 발자국을 그렸다.

평소였더라면 기온과 눈으로 인하여 한층 차가워지고 차분해진 주변을 기분 좋게 둘러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 형태를 잃어버린 채 앙상하게 가지들만이 남은 단풍나무에서 풍겨져 나오는 냄새라던가 눈과 닮은 하얀 벽에 물들어져 있는 아직은 퍼런 기운이라던가 어두운 잿빛 기왓장에서 풍겨져 나오는 돌과 흙냄새 등을 말이다. 허나 지금은 이 익숙한 전경을 감상할 기분도, 그럴 정신도 아니였기에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숨결에서 나온 연기만큼이나 발자국이 길게 늘어진다.

느릿하게 옮기던 발자국은 그의 집 중앙 부근에 자리잡고 있는 연못에 도착해서야 종적을 멈추었다. 사람마저도 기세 좋게 얼려 버릴 듯한 한파니 연못 또한 단단히 얼어붙게 한 것은 당연하리라. 새벽의 끝자락에 걸쳐져 탁한 무채색으로 잔뜩 물들어져 있는 연못에, 곳곳 흉마냥 달라붙어져 피어난 성에들이 있어 한층 더 일그러지고 못나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제 모습과 같다 생각되기에 오히려 마주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해져 오는 게 아닌가. 내면을 마주하기엔 최적의 사물이라 생각이 되어 숨을 들이쉬고선 연못 앞에 천천히 앉았다. 시린 공기가 숨을 내 쉴 때마다 폐부에 스며들고 눈 밭 위에 앉은 까닭에 이제는 발뿐만이 아니라 하반신을 타고 퍼져 올라오는 한기로 제정신을 차릴 법도 하건만 혼탁한 머릿속이 말초신경에서 보내오는 신호들을 모조리 다 집어삼켰다.

 

아무래도 그 날, 잃어버린 것은 제 눈 만이 아니였는 듯하다.

 

자신은 직위도 한몫 하기야 할 테지만 원래 누군가 제 몸에 손을 대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성정이었다. 가문의 차기 가주로써 자라왔고 가주가 되었고 나라의 기둥 중 하나가 되었고 어찌하였던 현재는 한 부서의 대장이 아니던가. 자신을 옥죄어 오는 모든 것과 가문의 일을 벗어던지고 싶었기에 평화구역으로 와 한량처럼 뻗대며 책임을 회피하며 보냈던 나날들이었다고는 하나 신분과 성정은 어디 가지 않았었다.

자신이 자라오며 배운 것은 소중한 것은 높은 확률로 잃어버릴 수 있으니 만들지 않는 것이 명석하며 곁을 허락하는 것은 강한 자인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제 가문이 자신에게 만들어 주었던 길이고 그리고 그것은 언제부터가 원래의 뜻이 무엇이었는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잊어버리게 될 정도로 자신의 의지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 살았기에 평화구역에 오기 전 화 국내에서 가주로써 제 몫을 하였을 때에는 목적이 없는 이상에야 계급이 낮은 자와는 눈조차 마주하지 않고 말 또한 섞지 않았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솔직히 즈한은 그가 제아와 관련이 있고 그에게 달려 있는 소문과 그 미모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처음부터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자신이 반사적으로 제 몸을 버려가면서 아무런 이득이 될 것이 없는 그를 감쌌다는 것은 무슨 연고로 그리 하였는지 작정하고 추궁한다면 말을 돌리기가 제법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우연으로 어쩌다 한 번 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물론 이번에는 평소와 다르게 한쪽 눈이 날아가는 바람에 일이 커지기야 하였지만 반쪽만 남은 이 시야가 유감스럽기는커녕 자신이 아끼는 꽃과 닮은 삶의 구석이 생겼다라고도 생각이 되기에 이건 어찌 해석을 해도 날이 지나면 날아가버리는 한낱 가벼운 기분은 아니리라. 

오랜 벗과 술잔을 기울이던 그 날, 이미 제 마음이 술잔 안의 술처럼 넘치기 직전 마냥 기운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직히 입으로 마음을 옮겨 담을 수는 없었다. 말은 꺼내는 순간부터 묘한 힘을 가지는 구석이 있기에 그 모습을 꺼내어 타인에게 건네는 순간부터 제어하기 더욱 어려워 진단 것을 알고 있기에 진심이 담긴 것들은 꺼내놓지 않는 것이 제 오랜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꺼내어 무얼 하리,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 생각하며 마음속 수시로 일어나는 수면 속 파장을 외면하기 급급했다. 허나, 멈추지 않는 일렁이는 물결은 언젠가 파도가 되기 마련이지 않던가.  그 파도가 자신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야 하였다.  그것을 직감한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던 것인가.

 

즈한의 집에 불청객으로 수시로 드나들다 눌어붙기 시작하던 그 낯설고 설익은 느낌으로 관계가 수놓아졌던 1년 차였던 때였던가.

해가 지나 2년이 되면서 그가 어느덧 항시 제 찻잔을 하나 더 준비해놓았을 때였던가.

또 한 번의 해가 지나 3년이 되어 그가 혼자서도 돌아다니며 조금씩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 마냥 활동의 범위를 아주 조금씩 느리게 넓혔을 때였던가.

다시 한번의 해가 지나고, 또 지나고... 어느새인가 마치 어린아이 마냥 제 행동을 조금씩 따라 하던 그 모습을 바라보던 때였던가.

 

바랬었나, 바라었나, 아니었나, 그랬던가, 아니였던가.

아니, 실은 이걸 바랬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녔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돌아온 그 날부터 어딘가 달라진듯한 그의 모습과 태도에 제 마음의 동요가 걷잡을 수 없이 더욱 커져 갈 수밖에 없었다. 전보다 유달리 자신에게 붙어 있으려는 그의 행동과 변화가 와 닿을수록 제 마음이란 이름의 그릇을 수 없이 깨졌다 붙었다 하게 했다. 아니, 애초에 계속 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회복기간 동안 그토록 보고 싶었던 즈한의 선명한 모습에 넋을 놓았던 그 날. 그가 『어서 오세요』 라며 말을 건네었던 그 날에.

저도 모르는 새 그 온기와 아름다운 모습에 홀려 입을 맞추었던 그 날에. 입술을 떼기가 무섭게 제 품으로 다시 매달려 오며 입을 맞추었던 그 사랑스러운 체온과 손짓에 기운 마음을 주체치 못하고 그 얼굴을 어루어 만지며 보고 싶었노라고 마음을 말했을 그 날에. 자신을 바라보던 그 금을 녹여 만든듯한 어여쁜 눈에 조금 비추어진 기뻐 보이는 듯한 그 감정에 선을 넘을 뻔했던 그 날부터. 

그래, 그랬었다. 그전부터 마음의 동요로 금이 갈 때로 가 있던 그 형상은 그 날에 부서진 게 확실했다.
단지 다시 붙여 놓았노라고 제 자신이 착각하고 있었을 뿐.

이런 일도 있었다. 제가 다시 온 지 얼마 안 되어 리슈가 주고 간 꽃들로 즈한이 제 머리에 꽃꽂이를 하던 날이었는데, 심지어 그 날엔 제 품 뒤를 안으면서, 그 옛날 연꽃등이 흘러가던 날 제가 본인의 손을 잡아주었던 것이 좋았는지 똑같이 흉내 내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랑스럽고 귀여운 행동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었다. 그다음 날 이번엔 강이 아닌 하늘에 연꽃등을 띄우러 함께 가였었는데, 심지어 그 날에도 다시 한번 참기 힘든, 그 부드러운 입술을 맞추어 오는 바람에 살면서 공연 중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던 제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연등의 움직임을 멈추는 실수를 하였었다. 

이런 날들도 있었다. 이른 아침나절, 평소와 같이 그에게 인사를 하고서 제 할 일을 하러 나서였는데 즈한이 마치 어미닭을 쫓아오는 병아리 마냥 제 뒤를 졸졸 따라오는 게 아니였는가. 한 번은 그의 모습에 어딜 가나 물었더니 저를 따라오는 중이라 하였었다. 그런 그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어 품으로 들어 올리며 이럴 때는 이리하라고 말하였더니 제가 말한 대로 따라 대답하며 제 품에 온전히 기대는 것이 아니던가. 그 애가 탈 정도로 한껏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행동들로 인하여 마음이 한껏 설레어 모든 것이 꿈결과도 같이 느껴질 정도로 곱고 달은 날들이었다. 

그런 그의 변화가 조각난 마음에 아름다운 기억들로 수를 놓으면 놓을수록 마음 한 켠이 무거워지는 건 어찌할 수가 없었다. 허나, 이대로도 좋지 않은가- 란 위선이 제 마음을 몇 번이고 덮어대 파편들이 발치 아래 널려 있는 것을 외면했던 것이 아니였겠는가. 그와 다시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위안과 그가 이런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전보다 자신을 좀 더 필요로 하는 그 어여쁜 모습에 취하여 본래의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기에 충분하였다.

 

행복하였다.

때로는 심란하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이 생활이 유지될 수 있다면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떠한 책임과 어떠한 위협과 어떠한 변화도 없이 그냥 이렇게 이대로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아둔함에 빠져 있었기에 그대로 이 모든 것이 마냥 지속될 것만 같았었다.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심경의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제 우연히 자신이 눈을 잃고 의식이 없던 그 날들에 즈한이 어떻게 지냈는가를 듣게 되었었다.

듣는 그 순간 눈 앞이 캄캄해지고 누군가 자신을 낭떠러지로 떠밀은 것 마냥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는 듯한 통증과 함께 그대로 굳어버렸었다. 다행히 가면을 쓰고 있었던 탓에 표정 관리가 안 된 얼굴은 드러나지 않아 체면은 구기지 않게 되었지만, 그 당시엔 가면을 쓰고 있는가 있지 않은가라는 제 자신에겐 더할 나위 없이 기본적인 생각들이 들 겨를 조차 없었다. 제가 없는 동안의 그의 상태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었다, 아니 예측하고 싶지 않았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그가 그에게 있어 좋을 것이 하나 없던 시절로 돌아 간것 마냥 애석하고 안타까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들 조차 잊게 할 정도로 온 정신과 머리를 태웠었다. 어제 하루를 어찌 보냈던가 지금 되짚어 생각해봐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하루 종일 그리 넋 나간 사람처럼 시간을 내다 버리다 즈한이 있는 이 곳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가면을 벗지 못한 채 그리 있다 그가 잠들고 나서야 벗었던 기억만이 선명하다. 

정확히는 맨 얼굴로 즈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정리되지 않은 제 감정이 쏟아질 것이 두려웠기에 때문에 그가 깊게 잠들고 나서야 비로소 제 가면을 벗고서 잠든 얼굴만이라도 마주 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던 그 날,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의 그 아름다운 외모에 넋이 나갈 뻔했던 그 날과도 같이 넋을 놓은 채 잠든 즈한의 모습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었다.

그러다 울었다. 이미 낡고 메말라 평생을 가야 눈에 눈물방울 달 일이 있으랴 생각하던 제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어처구니가 없게도 눈물이 나왔었다. 한참을 그리 범람한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 채 그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 침상 귀퉁이에 앉아 조용히 손을 뻗어 잠든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어 만졌었다.

그에게 왜 그리 하였는가, 왜 그랬는가, 내가 없다 한들 잘 지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물었었다. 잠에 곤히 들어 뻔히 답변을 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낮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혼자만의 질문을 읊조리며 그의 잠든 얼굴을 한 없이 어루어 만졌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의 존재가 즈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가 되었다는 것을 가슴 아리게 후회하였다.

왜 후회되지 않겠는가. 자신의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눈을 잃던 그 날에, 실수를 연달아하고 자만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자신이 끔찍이도 어여삐 여기는 이 꽃에게 상처가 된 그 날들이 없지 않았겠는가. 주지 않았어도 될 마음의 아픔 따위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하여 불러온 이 사태에 대한 후회가 뒤늦게서야 밀려왔었다.

아프게 하여 미안하였노라 하고, 혼자 두어 미안하였노라 하고 그를 어루어 만지며 혼자 계속 그리 읊조렸다. 그렇게 잠든 즈한을 계속해 바라보며 어느 정도 감정을 진정시키니, 이번에는 밀려오는 복잡한 생각들로 인해 거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늦게 잠이 들었었다. 

 

 

 

흉하고 탁하게 얼어붙어 있는 이 연못이, 즈한에게 자신의 존재가 소중해져 가고 있는 듯한 이 상황을 가슴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마냥 받아들일 수 없는, 제 자신의 일그러진 형상과 못남을 꼭 빼다 박은 듯하여 계속해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연못의 귀퉁이를 어루어 만지자 손 끝에 차가운 성에와 살얼음이 손이 닿기가 매섭게 달라붙는 것이 느껴져 온다.

 

자신이 없어도 잘 지내길 바라었다.

아니, 나를 그리워하길 바라었다.

내 자리의 무게가 그리 크지 않길 바라었다.

그 마음속 한 부분 나의 자리가 있길 바라지 않았던가.

그 언젠가, 내가 떠나도 아무렇지도 않길 바라었다.

실은 사람으로 돌아온 그가 제 곁을 떠날까 두렵지 않았던가.

그에게 자아가 없어, 나에게 마음 줄 일이 없으니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다면 꽃에 변화가 시작되었을 때 왜 도망가지 않았던 것인가.

꽃이, 사람이 되어 갈수록, 그것이 두려웠다.

변하는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어여쁘고 사랑스웠기에 기쁘지 아니하였던가.

원할 때에 언제든 없던 것처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정말 그리 원했다면 왜 이렇게 되기 전 그만두지 않았던 것인가.

정에 발목이 잠긴다 한들, 자르고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정말로 그를 혼자 놔둘 수 있겠는가.

아니, 그냥, 그렇게, 이리 살면 될 것이라 믿었다

언제 끝을 고할지도 모른 채 시간이 지날수록 제 아둔함에 머리를 묻고서.

조각난 파편들이 파도에 힘없이 휩쓸려 다니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 아니던가.

정녕으로 그 파도가 제 자신을 삼킬 것이란 걸 몰랐단 말인가.

사랑이라 깨닫는 것이, 사랑이라 인정하는 것이 두려웠다.

무엇 때문에.

살아온 그 모든 것이.

잘 될 리가 없다 생각하는가.

실수할 것이다, 후회할지 모른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지지 않으면 잃을 일이 없지 않은가.

이미 그로 인하여 충분히 잃을게 많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지금이라면 더 다치지 않고 끝낼 수 있다, 나도 그도.

더 다치고서라도 실은 얻고 싶은 게 아닌가.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런가.

아직, 과거로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 과거는 누가 만든 것이던가.

놓았던 것들을 다시 잡아야 한다.

그것이 원래, 내가 하여야 할 것들이 아니었나.

지긋지긋하기 짝이 없는 그 생활로 다시 돌아가기엔 숨이 막힌다.

이전 삶과 꽃을 잃어버리는 것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숨이 막힐 것인가.

그가 지금보다 더 사람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단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 하여 지금의 꽃을 사랑치 아니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저 참고 견디어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세월 동안, 또다시 한번 죽을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할 수 없단 말인가.

애초에 그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하다면 그때에 도망쳐도 좋지 않겠는가.

 

 

앉아 있는 하반신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손 끝의 감각 또한 얼어붙다 못해 불에 탄 듯 화끈 거리며 무뎌지기 시작했다. 마음의 결심을 하기 앞서 대 부분의 사람들은 친애하는 이를 찾는다던가 조언자를 찾기도 한다. 해답의 길을 대신해 받거나 자신의 결심을 더 확고하게 만들어주는 용기를 얻게 되길 바라면서 타인에게 기댄다.

허나 제 자신은 그럴 수도,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속내를 내 비추는 것은 약점이 잡히는 것과 똑같지 아니하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본심, 그것을 말하는 것은 제 약점을 남의 손에 고스란히 쥐어주는 것과도 같기에 그리 한 평생을 보내왔었다. 그렇기에 이런 자신이 이럴 때에 누군가를 찾는다는 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에 바로 오랜 벗이 떠올랐지만 그래 분명, 그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다 받아주고 좋은 대답 또한 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순수하게 결정한 것이 아니기에, 또한 그로 인하여 자신이 슌에게 가지지 않을 수도 가질 수도 있는 원치 않는 묘한 어색함이 싫었다.

애초에 사람이 하던 짓을 하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안 하던 짓을 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슌을 친애하고 신뢰치 않은 것은 아니나 내키지 않은 것은 자신의 성정 머리로써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슌을 그만큼 마음속으로 부터 진심으로 아끼기에 그리하고 싶지 않았다.

끊이지 않는 마음의 질문에 다시 한번 생각의 꼬리를 이어 물려던 찰나,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하고 제 가슴을 잡아 이끌며 늘, 자신을 애태우는 그 목소리가 들려와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 신홍 "

 

벌써 즈한이 일어날 시간이 되었던 것인가.

침실에 제가 없자 바로 나와본 것인지, 한 없이 얇은 머리카락들이 어수선하고 단장이 안된 채로 불규칙하게 흘러내리며 제 자신과 닮은 새하얀 잠옷 차림을 한 채로 호두나무 목재 바닥 위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연못에 이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는지 의아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그 어리숙하면서도 귀여운 모습에 맥이 풀려 버리고야 말았다.

 

이리, 내 너를 아끼는데 어찌 잊을 수 있겠단 말인가.

 

즈한이 제게 오기 위함인지 눈 밭 위로 맨발로 내려오려는 것이 보여, 그대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거기 있으라 말하였다. 추위에 한껏 얼려진 몸이 삐그덕 대는 것이 느껴져 왔지만, 그가 이리 오기 전 자신이 가는 것이 좋다 생각하기에 아랑곳 않고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자신이야 제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일부러 몸을 혹사시킨 것이었지만 즈한이 이 의미없는 행동을 따라 할 필욘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아무리 즈한이 통각에 둔하다고는 하나, 그가 맨 발로 눈 밭을 걸어 다니는 곳은 싫기에 제 쪽에서 사양할 일이었다. 

 

" 일어났는가, 간 밤에 별고 없이 잘 자였는가 "

" 네, 잘 잤습니다 "

 

연못에 올려두지 않은 손으로 평소와 다름없이 그의 앞 머리를 매 만져 주려다 멈추었다. 밖에 있는 시간이 제법 되었는지 그 손 또한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탓에 이대로라면 즈한의 얼굴에 손이 닿여 차가울 수도 있으니 그리 하고 싶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잠옷을 입고 있는 부위라면 그나마 괜찮겠지란 생각이 들어 그대로 그의 등에 손을 올려 가볍게  토닥이곤 방 안쪽을 다시 향할 수 있도록 그의 몸을 살짝 돌렸다.

 

" 날이 많이 차네, 어서 들어가 하루를 보낼 채비를 같이 함세 "

 

평소와 같이 웃으며 아직 따뜻한 온기가 많이 남아져 있는 침실로 그의 걸음을 재촉하였다. 너무 이른 아침이기에 그 시린 냉기에 그가 고뿔이라도 걸릴까 우려되었기에 밖에 계속해 있는 것은 원치 않았다. 제 몸은 들어가 자세히 살펴봐야 알기야 하겠지만 재수가 없으면 어디 한 군데쯤 동상에 걸렸을 것이고, 재수가 좋으면 고뿔 정도로 그칠 테지만 즈한마저 고뿔에 걸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사지가 잘 움직이는 거 보니 동상까진 가지 않은 듯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상 깨어 있는 즈한의 얼굴을 하루 만에 보자니 내심 기쁨이 먼저 올라와 지금 당장은 복잡한 생각을 마저 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하루를 보낼 채비를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밀려오는 잡념들은 잠시 그렇기 단절시킨 채, 침실로 잠시 종적을 감추었다.

 

 


 

 


어느덧 정신없는 이른 아침이 그리 흘러가고 점점 하늘 높이 올라가는 해의 높이만큼이나 조금씩 조금씩 기온도 따뜻해졌다. 물론 그래 봤자 한겨울의 날씨에 그 얼마나 따스할까 싶냐만은, 적어도 찬란한 해가 비추는 곳곳마다 제 색상과 하얀 눈에서 반사되는 그 선명한 빛들로 인하여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모습보다는 시각적으로는 훨씬 따스해 보일 것이다.

즈한의 집 집무실 바닥에 앉아 시선을 그에게 고정한 채 떼고 있지는 않지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격자무늬의 문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아침의 햇살이 하얗고 어여쁜 꽃을 닮은 그를 비추고 있었기에 대략적인 감으로 바깥도 훤히 밝았겠구나 하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근래 아침나절 일을 보러 갈 때에, 종종 즈한이 자신을 따라나서기도 하였기에 그냥 오늘은 그의 집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그가 어떨 때에 자신을 따라나서는지 어떠한 행동 원리로 자신을 따라다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에 혹여 오늘도 길을 나서는 자신을 따라올지라면 그것을 거절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 매우 어려운 일이라 그냥 집에 있기로 한 것이다.

밖에 나가려는 이유인즉 당연히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니고, 아까 하던 고민에 대한 것을 마저 마무리 짓기 위함인데 막상 이리 그가 일어나 움직이는 것을 보니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기 이를 데가 없다 하였다고, 마냥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고 싶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일어났을 당시만 하였더라도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면 생각을 깊게 하는데 심란함이 증폭하여 방해가 될까 우려되었던 생각은 오간데 없어지고 그저 그가 옆에 있음으로 인하여 찾아오는 이 평온하고 달콤한 평화가 한없이 따사롭기 그지없기에 그대로 발 길을 멈추게 된 탓이 크리라.

 


5년 전 그 날, 즈한의 집무실 속 이 탁상 앞 양반다리를 한 채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었던 그 날처럼.

안녕하세요 라며 그 아름답고 고운 얼굴로 제 얼굴을 바라보며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하는 귀여운 질문을 물어보았던 그 날처럼, 그의 탁상 앞 마주편에 자리 잡아 그가 집무를 하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며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이젠 물음이 아닌 웃음으로 자신과 시선이 마주할 때마다 그 어여쁜 미소를 지어 준다는 것이 다르다 하겠다. 물론 5년 전에도 몸에 밴 습관마냥 예의상 짓는 그 잔잔한 웃는 듯, 웃지 않는 듯한 미소를 항시 달고 있던 그였지만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그런 웃음이 아닌, 다른 미소를 지어준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 다른 웃음을 처음 보았던 그 날부터 눈을 감아도 언제나 선명하게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던 그 웃음이니 말이다.

지금도 일을 하다 문득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자 어눌하여 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이쁘게 뻗은 눈썹을 평소보다 좀 더 늘어 트리며 웃어주는 그 모습에 이토록 가까이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즈한만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 한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와 더욱 미소 지어 보이자 다시 제 할 일을 시작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그의 모습을 따라 자신의 시선도 천천히 따라갔다. 

일어나자마자 시린 한기로 혹사당한 몸에 당연히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했는지라 그를 쫓고 있는 시선이 간간히 멍해져 옴이 느껴졌다. 머리는 여전히 둔탁했다. 아마 이 상태라면 해가 떠 있는 낮 시간부터 병세가 짙어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해가 떨어질 쯤엔 제대로 고뿔에 잠겨 버릴 테지만 아직 그러기까지 시간은 있고 즈한에게 고뿔을 옮길까 우려가 된다면 언제든지 나가서 묵고 오면 되는 것이었기에 급히 엉덩이를 떼 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머리가 맑지 않은 탓에 사고 또한 평소와 같이 명석할 수 없는 데다가 나이로 인한 노화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이지 잠깐 그 난리를 피웠다고 몸이 삐그덕 대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이 삐그덕 거리기에 몸도 같이 그러는 것인지, 어느 쪽인진 알 수 없으나 그냥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마치 깨어 있는 채 잠에 빠진 것처럼 그렇게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어여쁜 꽃을 감싸는 것을 아득히 정신이 멀어지면 멀어지는 대로, 가까워지면 가까워지는 대로 두면서 계속해 바라보고 있다 자신 또한 생각에 잠기었다.

 



마치 사춘기 아이 마냥 수시로 기분이 오르내리락 하며 사고의 방향이 여러 갈래로 튀고 정서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이 느낌을 마냥 유쾌해하며 자신은 즐길 수가 없었다. 세상이란 한 수 앞을 잘못 두면, 수를 둔 당장은 괜찮을지라도 그게 쌓이고 쌓여 결국 재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는 것을 뼛속 깊이 익히고 있기에 이렇게나 머리가 맑지 않은 상태를 달가워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계산치 못한 실수가 나오는 것이 몹시 나도 싫었으며, 혹은 감추지 못한 의도와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도 소름 끼치게 싫기에 늘 타인과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지나온 세월이 즐겁지 않았는가, 후회가 되는가 물어본다면 그렇다고도 그렇지 아니하다고도 말할 수가 있겠다. 뭐라고 딱 하나 잘라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 자신의 인생이요, 본인 그 자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살아온 생에 있어 가장 찬란하고 행복했던 때가 어느때였노라고 묻는다면 꽃과도 같은 그와 함께 하였던 때였노라고 제가 인지하기도 전 가슴이 먼저 입을 열어 말하게 할 것이 불 보듯 뻔하였다.



근 5년간 한결 같이 보고 싶어져 찾아가던 사람이었고. 

그 관계가, 그 감정이 늘 순탄치만은 아니하였지만.

늘 한결같은 표정과, 늘 한결같은 그 모습에.

제가 언제 사라져다 온다한들 늘 그 자리에서 있어주는 것이 한결같았기에.

매일의 안식처가 되고, 어느새 삶의 안식처가 되어

당연하게 여기고 싶을 만큼 계속되었으면 좋으련만 싶은 그러한 하루하루였기에. 

어찌 될지 모르는 앞 날이기에 피어오르는 감정을 밀어내려 하여도 

이미 제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단지 몸뚱이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그를 향한 감정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그저 덮어두고 아닌 척 외면하고 있었던 것을.

 

스스로를 속이려 수 없이 번복하고 체념하려 부단히도 애를 써보았지만 자가당착에 빠질 뿐이었던 나날들이었음을 왜 모르겠는가. 

 

진정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하였다면 언젠가 그의 집 한 구석에 자신의 물건들이 담긴 붉은색의 보자기를 갖다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붉은색 보자기 안에 있는 물품 중 하나는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물건인 데다가 그 물건을 주고 싶은 상대는 즈한 뿐이었다.

그 외의 사람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기에 그에게 줄 수 없다면, 만일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기에 어느 순간 이 집에 갖다 두었다. 들여놓을 당시에는 언젠가 주게 되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지라는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가져오기야 하였으나, 애초에 그에게 연정을 품은 면이 없었더라면 그것을 들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어찌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해봐야 하기에 멍해진 머리를 부단히 도 움직여 느릿하게라도 사고를 돌렸다. 분명 즈한은 평화구역 내에서야 기록관리부서의 일원으로 직위가 있기야 하지만, 화 국내로 돌아가면 일반 백성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다. 가문 쪽으로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기에 아우들과 누이들이 즈한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해하지 않을 것인가를 걱정하여야 했다. 

5년 동안 자신이 가주 노릇을 하지 않으며 즈한의 옆에서 신선놀음을 하면서 한량처럼 뒹굴기야 하였지만... 자신이 그간 쌓아온 것들이 있기에 그 공을 치하하고자 가문에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것은 그다지 맞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언제 다시 가주로써 활동을 하여 이득을 안겨 줄지도 모르는 존재가 자신이기에 내 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는 쪽이 더 맞을 것이라 장담한다. 제가 자신을 더욱 장성하게 만들어 두어야 그것을 물려받았을 때 이득이 될 터이니 말이다. 

오히려 자신이 평화구역으로 빠져 있는 동안, 화 국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을 형제들임을 잘 알고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가주로써의 자리는 자신이 죽거나, 혹은 후계자에게 물려줌으로 인하여 내려올 수 있는 자리이니 제게 밉보여 하나 좋을 것이 없기도 했지만 제 형제들은 막내인 아리를 제외하고는 그리 유순한 성격들이 아니었다.

혼인조차 하지 않은 자신이었기에 슬하에 자식이 있을 리가 만무하여, 형제들의 아이중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긴 하였으나 후계자를 자신의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가주만의 권력,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 중 가장 강한 패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 사유로 자신은 건들 수가 없으니 가장 우려되는 것은 역시나 제 형제들이 즈한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까 하는 심려가 더 큰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리라.

자신이 혼인을 하지 않은 것과, 한 것은 다르기에 이로 인한 그들의 변화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애초 가정을 꾸리지 않았기에 자신을 견제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암묵적인 협력자로 보고 있기에 되도록 건들지 않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즈한과 정인 혹은 연인이 된다면 그들의 태도가 어찌 변할지 미리 앞을 보고 수를 두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도 있으리라.

사내 둘이라 하여, 애가 없다고 해서 오히려 좋아할 단순한 사고의 형제들이 아니었다. 왜냐면 그들에게 있어서 제 자신은 변덕이 죽 끓듯 해 보여서 언젠가 그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애를 기르겠다며 후계자를 어디선가 데려와 즈한과 함께 기를지도 모르는 일 일 것이다.

자신이 가정을 꾸린다는 것, 그것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자신이 되찾았다고 생각하여 충분히 견제할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경계하고 그 쪽들에서도 수를 놓으려 들것이다. 본디 모름지기,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무섭다 하지 않는가. 심지어 같은 핏줄인 제 형제들은 어찌 되었든 간에 한 명을 제외하고는 이 놈이나, 저 놈이나 하나같이 속이 시커매 처리하기 까다롭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었다.



셋째는 저와 외모가 비슷하지만, 성격은 정 반대로 고지식하기 이를 때가 없는 재수 없는 녀석이다. 물론 가문의 법칙에 따라 항상 웃는 얼굴을 유지하여야 하기에 차라리 제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까만 가문 가면을 항시 쓰고 다닐 정도로 성격이 꼬장 하기 이를 때가 없는 녀석이니 만일 자신을 누군가 죽이러 온다면, 이 녀석일 확률이 가장 크다 생각한다. 생각을 해보자면 셋째가 평화구역 내 자신의 행동을 보고 가문에 먹칠을 한다고 한 번쯤을 찾아와 자신을 뒤엎으려 하였을 텐데도, 이리 조용히 있는 거 보면 목적이 생겼기에 얌전히 있는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것을 알아보고 수를 둬야 할 것이다.

넷째는 얼핏 보면 제 성격과 비슷해 보이지만 애초에 정이란 게 없는 매정한 여인이다. 저와 마찬가지로 무언가의 이유들로 변덕이 죽 끓듯 해 보이는 사람이며 그 날 그 날의 기분에 따라서 행동 예측 범위가 달라진다. 자신과 여섯째를 제외한 형제 중 가장 좋은 가문과 연을 맺어 가문을 번창하는데 공헌한 사람 중 하나이지만 제 정인을 두고도 버젓이 다른 외간 남자와 자기를 수십 번 하기에 처신이 좋아 큰일이 나지 않았다 뿐이지 골치 아프긴 매한 마찬가지인 여인이다.

다섯째는 형제들 중 어찌 보면 가장 가문에 어울리는 녀석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성적으로 남을 이용하길 좋아하며 누군가를 모함에 빠트리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녀석이기에 오히려 능력만 출중하였더라면 이 녀석이 가주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득이 되지 않는 자에겐 한 없이 매정하기 그지없는 녀석이기에 오히려 즈한을 해한다면 이 녀석일 확률이 크다 예측된다. 애초에 셋째와 넷째는... 즈한을 보고 자신들이 즈한을 가지고 싶어 할 확률이 높기에 그런 의미로는 견제 대상이긴 허나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쪽의 걱정은 이 녀석을 가장 먼저 하여야 했다.

여섯째는 애초에 가문의 능력인 바람 주술을 타고나지 못한 여인이라 태어날 당시 살해당할뻔한 것을 자신이 살려두고 슬하에 보호하고 있던 아이이고, 그 덕분에 가문의 사상을 주입받지 않은 채 제 본연의 모습으로 자라 날 수 있어 나름 인간적인 면이 많이 남아 있는 아이이니 걱정할 것이 없지 않을까 한다.



이처럼 성격들도 제 각기 달라, 같은 방법으론 그들을 묶어 둘 수도 없거니와 처리할 수도 없어 다른 수들을 여러 번 겹쳐 놓아야 할 것이다. 물론 후계자를 자신이 정할 수 있다는 그 패를 최대한 활용해서 조심스럽게 진행해야겠지만, 그 패가 사라졌을 때도 대비하여 진행을 하여야 한다.

실은 자신은 평화구역 내 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그 이후의 삶을 포기했었다. 그 언젠가 가문의 후계자를 정하면 그 뒤 자신의 생사는 어떻게 될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기에 있는 동안에 최대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였던 것도 이 탓이 컸다.

아마도 후계자를 정하고 나면... 최소한 모함으로 인하여 어딘가로 유배되거나, 혹은 형제들 중 누군가가 보낸 자객으로 인하여 암살당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을 반쯤 송장으로 만들어 어딘가에 가둬두고 껍데기처럼 쓸 것이란 건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선대들도 아비 또한 그리 되었기 때문에 제 미래를 그려보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아비 때엔 계략을 꾸민 건 제 자신이 아닌 다른 형제들이 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 옛날, 셋째가 자신의 자리에 불만을 품고 차기 가주의 자리를 가져가기 위해서 계략을 꾸미던 도중 다섯째 쪽의 사람이 자객을 보내 아비를 죽였었다. 아비를 죽이고 차기 가주를 다섯째에게 물려준다는 필체를 위조한 문서를 만들던 도중 참 세상살이 재미있게도 셋째 쪽 사람과 맞부닥치게 된 바람에 상황이 아주 가관이 되었던 것이었다. 넷째라고 가만히 있었으랴, 간사하게도 셋째와 다섯째가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때를 노려 이득을 취하려 시기만 재느냐고 아무것도 안 한 것처럼 보였던 것뿐이란 것을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리고 젊은 나날들에도 그리 행동했던 녀석들인데 나이를 먹고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 더 비틀려버린 그들이 과연 자신과 즈한을 가만 놔둘 리가 있겠는가. 어릴 때야 아직 능숙하게 계략을 펼치는 법을 모르기에 실수들이 맞물려 그리 되게 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수를 쓰자면 옛날과 같은 어리석은 일들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더 번창시켜놓은 이 가문을 어떻게 하면 손 안 대고 삼켜 버릴 수 있을지 매일 같이 즐거운 고민마냥 하고 있을 녀석들이니 오히려 즈한을 이용하여 어떻게 하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수를 놓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할 것이 뻔하기에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최대한 권력을 다시 손에 쥐고서 자신과 즈한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묘안이라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다시 가주로써 활동을 재개하여야 하였고,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면서 가문을 번창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자신과 즈한의 만일을 대비한 차선의 보류 망들을 차곡히 그리고 견고하게 쌓아두어야 할 것이다.

적문 누님과의 일도 다시 시작을 해야 할 것이고 교류가 잠시 끊겼던 가문들에도 기별을 넣어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5년간 쌓인 수많은 자질구레한 가문의 일들도 처리해야 할 것이다... 생각조차 하기 싫다. 귀찮다. 돌이켜 보면 한 평생 일한 기억들이 수두룩한데 이 나이 먹고서도 해야 하다니 어지간히도 하기 싫은 마음이 제 머리를 잡고 흔들어 댔다. 아마 혼자서 그것들을 다 처리하려면 근 1년간은 즈한과의 시간을 없애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다른 수를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부르게 된다면 어떤 사람들을 이 곳에 불러야 할지도 생각을 해놔야 했다.



이러한 생각들을 계속해하다 문득 즈한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른 생각들을 덮었다. 좀 전까지 생각한 고민들은 즈한이 자신과 연인이 되었을 때 일어날 것들을 대비하여 미리 한 생각들이지만, 만일 그가 자신을 거부한다면 어찌해야 할지도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이었다.

느리게 숨을 쉬면서 차분히 자신의 탁상 앞에 앉아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마냥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그 아름다움을 품어 내면서 존재하고 있는 그 모습을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가질 수 있도록 그가 허락할 것인가. 

그건 정말로 자신도 장담키 어렵다 생각한다. 아니, 물론 제아를 제외한 화 국내 사람으로선 자신이 즈한을 가장 잘 알기야 하겠지만은 그는 여러 가지의 사고들로 인하여 자신의 자아를 잃어버린 것같이 된 사람이었기에 그가 어떠한 구조로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애초에 그가 다시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 조차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물론 몇 년의 세월 동안 그가 천천히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찾아가는 듯해 보였으나, 그 끝이 어찌 될지는 수를 정확히 수를 놓기가 어렵다. 애초에 보통 사람으로써 서로의 연인이 된다던가 혼인을 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연정을 품을 때에 하는 일이거늘, 그가 그것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기에 자신이 그에게 마음을 전하고 고백을 한다 한들 그것을 그가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이 제 진심을 즈한에게 말한 뒤 그에게 어찌 생각하냐고 그의 의견을 물었을 때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는 새에 헛웃음이 터졌다.



" ? "

" 아, 아니 아닐세. 아무것도 아니네, 하던 것을 그저 계속하시게 "



제가 갑자기 웃자 붓을 놀리던 그 고운 손을 멈춘 채 자신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얼굴이 어여뼈 손사래를 저으면서 아무것도 아니니 하던 것을 계속하라 말을 하였다. 그러자 다시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그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어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생각의 꼬리를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즈한의 경우, 지식적인 정보는 하는 일이 하는 일인지라 굉장히 대답을 잘하였다.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도 많을뿐더러 기억력 또한 매우 좋기에 가끔 제가 모르거나 기억지 못하는 정보들을 그가 잘 알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반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물으면 언제나 돌아오는 것은 한결같은 대답이었기에 가장 먼저 저 상황이 떠오르는 것은 자신으로써 어쩔 도리가 없는 노릇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라.

이건 긍정적인 의미로도 해석이 되고, 부정적인 의미로도 해석이 되기에 수락인지 거절인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그런 애매모호한 대답이 될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상처를 받았겠지만 자신은 이미 즈한의 그런 모습조차도 한 없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을뿐더러 자주 겪어보았기에 유별날 것도 없었다.

만약 그 대답을 들으면 어찌할지도 생각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평상적인 방법이 아닌 즈한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가 수락이나 거절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할 수 있도록 말이다.



순간적으로 그의 어리숙한 모습을 그려보고선 웃음이 터진 탓일까.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열기가 빠져나가 짐에 느껴짐과 동시에 제 몸에서 달갑지 않은 열기가 올라옴이 느껴져 왔다. 이어서 생각을 하여야 하는데... 

점점 아득해져 가는 정신과 깜빡이는 시야가 그것을 방해했다. 

정신을 차리려 의식적으로 멀어져만 가는 사고를 깨우려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졸음까지 밀려온 것인지 눈꺼풀의 무게가 천근이 된 것마냥 계속해 내려앉았다. 

의식이 사라지니 노곤하고 뻐근해진 몸과 밤 사이 보충하지 못한 수면이 자꾸만 자신을 짓누르는 게 느껴져 자고 싶어 졌다. 



꾸벅 꾸벅.

 

제 자신이 조는 것이 느껴져 그냥 이대로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할까 싶기도 하였지만, 왜인지 그가 없는 침실엔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생각이 제 자리를 지키게 하였다.

... 아니, 이유야 알고 있지 않은가...

혹시라도 그가 거절하여 이 집을 나가게 된다면 그의 이 모습을 더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 걸음을 떼지 못하게 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가 거절한다면... 어찌해야 좋을지.... 

아니, 그냥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라는 생각을 하다

 

어느 순간 시야와 기억이 저 밑으로 가라앉으며 그대로 수마가 잡아 이끄는 대로 잠에 빠져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제 옆으로 즈한이 다가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대로 앉은 채 잠이 든 자신이 신기하여 옆에와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위화감에 옆에 와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이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되지만 자신이 걱정되어 자신을 살피고 있는 것인지 어느 것인지 도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즈한이 바로 자신의 옆에 와 앉아 있단 것에 이뤄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아직 밖이 이리도 훤히 밝은 것을 보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듯했다. 

그렇다는 말은 정말 잠깐 졸았던 것이리라. 

어느 정도 몸에 열기가 퍼져 노곤해지면서 둔해진 몸의 상태가 생각보다 빠르게 고뿔 기운이 저를 잠식하고 있음이 느껴져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였다. 평소였다면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즈한에게 괜찮다며 내 오늘은 밖에서 자고 올터이니 기다리지 말라고 말을 했었을 텐데... 지금은 머리로까지 열기가 올라갔는지 그저 멍하니 자신도 그의 얼굴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의도된 어리광을 부려본 게 대체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장난스럽게 해보고 싶어 져 반쯤은 어리광이 섞인 짓궂은 행동들은 수 없이 해왔던 자신이기야 하였지만 마음이 담긴 어리광은 쉽사리 남에게 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러한 약한 모습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은 제 삶에 있어서 허락되지 않았던 탓에 하고 싶지 않았었다.



뭐라고 단정 짓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자신을 계속해 바라보고 있는 즈한의 어깨에 그대로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머리를 기대니,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그의 향기가 더 짙게 맡아져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무리 그의 평상복이 두껍고 겹겹이 쌓여져 있다고는 허나, 그것들로는 즈한의 사랑스러운 향기를 다 감출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물이 많아 잡내가 많이 섞인 시장이나 일터라면 모르겠지만 심지어 조용하고 한적하기 그지없는 그의 집이었기에 이리 가까워질 때면 그의 향기를 마음껏 취할 수 있는 이 집이 너무나도 좋았다.



" 즈한, 자네 동백꽃과 그 꽃말을 아는가 "



그대로 눈을 감고서, 그에게 머리를 기댄 채,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입이 움직이는 대로 말을 열었다.



" 네, 동백꽃은 속씨식물로서 차나무과이자 꽃이 피는 시기는 1월에서 4월, 그 색상은 붉은색과 흰색이 있습니다. 꽃말은 진실한 사랑, 겸손한 마음, 기다림 등이 있으며 또 다른 꽃말은 "

" 거까지 대답하여 주었으면 됐네, 고맙네 "



예상은 하였지만, 역시나 지식적인 의미는 그가 알고 있구나 싶어 그 뒤에 말은 일부러 듣지 않았다. 

아니 실은 그 뒤의 말을 들으면 걷잡을 수 없이 제 자신이 동요될 것만 같아 들으면 안 되는 말이었다. 그것이 지식적인 것과 즈한의 상태를 이용하여 듣는 빈 껍데기와도 같은 말이란 것을 알기에.

그 선을 넘으면 안 되었다.

그렇기에 감사의 대답을 하고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자세 그대로 양팔을 벌려 품 안에 그를 가뒀다.



이대로 계속하여 자신의 품 안에 가두고, 

이대로 그를 넘어트려 제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진실하지 않다면은, 그냥 껍데기뿐인 것이라도 상관이 없다면은 그리하여도 좋았을 테지만 제가 즈한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그토록 가벼운 행동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를 그렇게 대하고서 자신이 얼마나 맨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 본인조차 예측하기 어려웠기에 하지 않는 편이 자신에게도 좋으리라.



" 즈한 "

" 네, 신홍"

" 잠시 시간 되는가, 내 자네와 같이 밖에 나가 함께 걷고픈 기분이 드네 "



얼마 전 평화구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 속, 동백꽃이 어여쁘게 피어져 있던 곳을 발견했던 것이 기억나 그에게 걸음을 함께 하기를 물었다. 

 

 

지금이라면 새하얀 눈이 덮여 굉장히 아름답고 이쁘게 변하여져 있을 것이다. 

만일 마지막이 된다면 그곳에서 그 와의 기억을 마무리하고 싶었고,

만일 그가 자신을 받아준다면 그곳에서 새로이 시작하고 싶어 졌다. 

이 추운 계절 홀로 피어 보는 이에게 따뜻함을 가지게 하여 주는 그 동백꽃들이 있는 곳에서.

 

 

 


 

 

 

겨울이 온 세상을 지배하였을 때의 가장 좋은점은, 모든 시끄럽고 잡스러운 것들이 고요하고 새하얀 눈으로 뒤덮이는 장관을 볼 수 있는 점이 아닌가. 어느 누구의 손 길도, 발 길도 닿지 않아 소복히 쌓여진 눈들로 인하여 새하얗고 눈부시게 덮인 숲 속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청아하여 기분을 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냥 보기에 한 없이 매 말라 볼품이 없는 나무들도, 그 투박한 짙푸른 잎을 가지고 있는 나무들도, 다소 너저분해 보이는 흑색의 길까지도 모두 하얀 눈으로 뒤 덮이니 단아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 끝에 다른 사람 살내음 하나 없이 주변 환경이 풍겨내는 차분해진 맑은 공기가 마치 속세와 멀어진 듯한 느낌을 주어 더욱 마음에 들 수 밖에 없었다. 다른 계절, 온갖 식물이 살아나 제 향기와 빛을 뽐내는 광경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으련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에서 멀어진듯 이 새하얗고 고운 눈들이 덮인 모습이야 말로 제가 어여삐 여기는 그의 모습을 빼다 닮았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더욱 좋았다. 또한 무엇보다도 동백꽃은 1월, 겨울에 밖에 피지 않는 꽃이기에 이 시기는 의미가 있었다.

그와 함께 집을 나서기 전, 다행히 환단을 복용하고 나온 덕분에 그리 나쁘지 않은 몸 상태로 이 곳으로 함께 올 수 있었다. 그 환단 자체는 즈한에게 원래 쓰려고 대비해 둔 것이었었다. 그가 고뿔에 걸리거나 하였을 때 쉬지 않고 습관적으로 계속하여 자신의 일을 하려 들면 먹이려고 지어둔 것이기야 하였지만은 지금은 찬물, 더운물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효과로 따지자면 탕약이 더 나았겠지만은, 그것을 지금 당장 다려 먹을 여유와 시간 따윈 자신에게 없는지라 어쩔 수 없었다. 해가 지기 전, 그와 함께 이 곳으로 오고 싶었으며 또한 그를 데려와야 하기에 아까와 같은 몸 상태로 하늘을 날아 이동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한결 나아진 몸 상태와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제 옆에는 이런 광경보다도 더 청아하고 고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존재가 있으니 앞으로 할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서라도 이 순간을 머리로 담고, 가슴으로 한 번 더 담고 싶었다. 자신이 한쪽 팔을 둘러 반쯤 품에 안은채 걸음을 옮기어도, 그 어떤 싫은 말 한마디 담지 않고 저와 걸음을 맞춰 걸어주고 있는 이 사람이 몹시 나도 사랑스러워 모든 게 아무래도 좋아지는 기분에 휩싸였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하얀 길 위, 자신과 즈한의 발자국이 새겨질 때마다 그 눈이 밟히는 느낌마저도 좋을 정도로 그저 이 순간이 좋았다. 별 다른 말 한마디 없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제 옆에 그것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를 둘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곳에 온 의미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 자네, 춥지 않은가 "

" 네, 괜찮습니다. "

 

물줄기마저도 한파에 꼼짝없이 당해 맥없이 얼려진 숲 속은 바람 한 점도 없어 더욱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그 고운 목소리로 답하는 것이 더욱 잘 들려 귀가 즐거웠고,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그 웃음을 보니 눈까지 더욱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춥다 하면 언제든 제 망토를 벗어 입혀줄 요령이였기에 물음을 던진 것이야 하지만은 생각을 해보자면 그가 추위를 느낀다고 하여 말할 인물도 아니었다. 무척이나 본인의 상태엔 둔감한 그인지라 그저 제가 잘 챙기는 수 밖에 없겠지. 앞으로도 계속 이리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자신이 원래 데려가려던 곳에 가까워지니 군데군데 동백나무들의 흔적이 보였다. 아직은 작은 동백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고 나무에서 떨어진 동백꽃과 꽃잎들이 하얀 눈 위를 불규칙하게 수를 놓고 있는 것이 보여 슬슬 운을 떼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추위에 입까지 얼어붙은 것인지, 쉽사리 입술이 서로 떼어지질 않는다. 

 

그저 그를 안고 있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자신의 옆에 더 붙게 하며 걸음을 더 느리게 걸었다.

대기 중에 퍼져 나가는 숨결만큼이나 이 시간이 이리 흘러가며 흩어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까 미처 다 하지 못한 고민들이 기세 좋게 하나둘씩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만일 그가 거절한다면, 그의 이 향기를 지우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흐를 것인가. 그가 이 마음을 떠나는데 얼마나 많은 밤이 지날 것인가. 아니, 애초에 제 수명이 다하기 전 삶이 타의로 단절될지도 모르니 눈이 감기는 그 날까지 많이 그리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 좋지 않겠는가. 

꽃이 떠난다 한들 제 마음에 핀 꽃까지 지진 않을 터이니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에도 그로 가득 찬 마음이 가난하고 비참해지진 않을 것이었다.

 

사랑이란,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도 마음에 품고만 있어도 좋은 것이라 하지 않는가.

 

" 자네, 사랑이란 말의 뜻을 아는가 "

" 네, 사랑이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히 여기는 그런 마음, 혹은 그러한 일을 뜻합니다 "

 

그리고 욕심이, 그 사랑을 가지고 싶게 하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 원흉이 아니던가.

 

" 그럼 비슷한 단어인 연모의 뜻은 아는가 "

" 이성을 사랑하여, 간절히 그리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 그렇네, 그럼 또한 비슷한 단어인 사모의 뜻은 아는가 "

" 그것 또한 애틋하게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의 마음을 뜻합니다 "

" 맞네, 그럼 심애의 뜻도 아는가 "

" 사람을 깊이 사랑하는 것 혹은 그러한 사랑 자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

" 모두 다 맞을세, 다 그런 뜻이라네. 말해주어 고맙네 "

 

제가 물으면 묻는 대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알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그 고운 목소리로 답하는 꽃의 모습에 한편으로는 그것이 슬프면서도, 한 편으로는 설레었다. 동백꽃의 꽃말을 이용하여 듣고 싶었던 마음이 있기야 하였으나 차마 그것은 허락할 수가 없기에 이렇게나마 간접적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되었다. 단순히 단어의 뜻을 말하는 것임에도, 그 어여쁜 입에 그러한 내용들이 올라가자 이리도 마음이 떨리지 않는가. 

 

그 욕심에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기에 그리하여 사랑은 눈먼 자들의 것이라 하지 않던가.

 

자신이 웃자,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그 가슴 아리게 하는 미소를 다시 지어 잠시 그를 마주 보며 발걸음을 멈춘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제가 걸음을 멈추자 자신도 멈춘 채, 조금 의아한 듯 올려다보는 그 고운 얼굴을 감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들어 천천히 어루어 만지었다. 아무런 저항 하나 없이 제가 만지면 만지는대로 그대로 몸을 맡긴 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이 곳, 저 곳 하나도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어느덧 매일 아침마다 만지었던 이 얇고 고운 머리카락도, 살로 채워져 있다고는 허나 안타까운 자상이 가득한 한쪽의 눈에 연고를 덧대어 발라주었던 기억도, 금으로 빚어진 그 어떤 장신구들 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을 내는 눈도, 제게 부벼오던 사랑스런 체온이 담긴 그 부드러운 입술도, 얼굴 곳곳에 수놓아진 그 귀여운 점들까지.

눈 감아도 눈 앞에 있는 것 마냥 이미 선명할 정도로 저에게 깊게 각인되어져 있는 그의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훗날 단 한 번도 생각이 나지 않아 후회할 일이 없도록 그 모습을 계속 덧 그리고 덧 그렸다.

 

어느덧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꽃송이가 하나, 둘.



그렇게 그의 얼굴을 어루어 만지며 마음에 그를 그려 나가는 동안 자신과 즈한의 사이로 하얀 눈들이 내려옴이 느껴졌다. 손등에 눈꽃송이가 닿자 그제서야 이성이 잦아 들어왔다.

지금과 같이 작게 눈이 오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만에 하나라도 눈길이 거세지기라도 한다면 곤란했다. 그리되면 하늘을 날 때에 방향을 잡기 어려울뿐더러 상공은 지상보다 훨씬 더 춥기 때문에 오래 있어 좋을 것이 하나 없는데 그 와중에 눈 세례까지 맞으면 곤란했다. 오늘의 이야기의 끝이 어디로 가든 그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줘야만 하기에 작게 숨 한 번 들이쉬고는 얼굴을 어뤄 만지던 손을 내려 그대로 그의 손을 잡았다.

 

" 이쪽 일세, 이젠 이 길로 가면 되네 "

 

괴이하고 이상하게 한쪽 방향으로 굽은 큰 나무를 기점으로 길을 틀었다. 언젠가 즈한을 이 곳에 한 번은 데려올 생각이었기에 주변에 표식이 될만한 나무를 기억해두고 있었다.

이 곳에 들어서면 길목이 좁아지며 나무 간격이 빼곡히 채워진 더 깊은 숲 안으로 그를 데려가야 하기에 어찌할지 잠시 고민을 하다 망토를 벗었다. 그리고선 한 쪽 팔로 즈한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고는 망토로 자신과 즈한의 머리를 덮었다. 그런 뒤 머리의 앞부분 자락을 들어 시야를 확보했다. 

 

" 가는 동안 나무 위 쌓여진 눈들이 쏟아질지도 모르니, 이리 감세나 "

 

즈한만 덮어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그의 머리 위 관모와 비녀에 걸려 머리카락이 당길 수도 있을 거 같기에 번거롭지만 이 방법을 택하였다. 자신이 하자는 대로 아무런 말 한마디 달지 않고 네, 하고 대답하며 수긍하는 그 모습에 다시 웃음으로 대답한 뒤 좁은 숲 속 길 안으로 그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었다.

 

예상했던 대로 나무들이 떨구는 눈덩이들을 좀 맞기야 하였지만은 망토를 덮고 있는지라 직접적으로 젖진 않았다. 외투를 벗어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제 옆에 제가 시키는 대로 딱 붙어 함께 와주는 그가 고마울 뿐이었다.

어느덧 나무의 간격이 다시 넓어지면서 이내 도착한 곳은 오랜 세월 자라난 것들인지 사람 키보다도 훨씬 높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여러 갈래로 불규칙하게 늘어지고 뻗어져 나가 장대하게 자라난 동백나무가 여러 그루 몰려 있는 곳이었다.

간밤에 내린 눈과 불어댄 바람으로 인한 것인지 동백나무들 아래와 주변으로 나무에서 떨어진 동백꽃과 꽃잎들이 얼기설기 여기저기에 흐드러져 있어 하얀색과 붉은색, 그리고 금색 술이 이루는 그 장경이 이뤄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봄이 아닌데도 벚꽃잎이 흐드러지게 핀 것 보다도 더 아름답게, 더 애절하게 하얀 눈 밭 위에서 그 새빨간 빛을 발하고 있는 수많은 동백꽃들이 장미보다도 더 화사하게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눈꽃송이들 조차 내리고 있기에 시각적으로 더 다채로웠음은 이뤄 말할 것도 없었다.



원하는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아쉽지만 그를 안고 있던 품을 놓고는 제 외투에 묻어져 있는 눈들을 털었다. 여기서 더 추위를 타 봤자 고뿔에 걸린 제 병세에 좋을 거 같지도 않거니와 있다 즈한을 안전하게 데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어디 벗어 뒀다가 땅에 떨어져 더 젖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눈길이 거세지기라도 한다면 그에게 덮어줘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와중에도 그를 챙기는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 사람일은 참 길게 봐야 안다고 하였다고 심지어 신 가의 주인인 자신이 이러고 있는 모습이라니 예전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상상도 못 했을 것이며 입에 담지도 못했을 텐데. 제 스스로가 이러는 것이 내심 웃기면서도 그런 변해버린 자신에 대한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어떤가, 예쁘지 않은가 "

 

외투를 다시 입으며 그에게 물으니 예의 그 웃음으로 자신에게 답해오는 것이 보여 자신도 웃음으로 답하였다. 그래도 얼굴을 돌려 천천히 이 곳, 저 곳 둘러보는 것을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닌 거 같았다.

그의 옆으로 가 자신의 손안에, 그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 잡은 뒤 가장 큰 동백나무 아래로 함께 걸음을 옮겼다.

쌓여진 눈들과 그 눈 사이로, 그 눈들 위에, 마치 어린아이가 수를 놓은 듯 불규칙하면서도 다양하게 흐트러진 동백꽃과 꽃잎이 그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동백나무들의 크기가 큰 만큼이나 그 밑에 떨어진 동백꽃과 꽃잎이 이뤄 말할 수도 없이 많아 마치 화창한 봄날의 꽃밭에 온 것 마냥 한없이 사치스럽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향이 짙지 않은 꽃이기에 그 점은 아쉽긴 하였지만 시각의 아름다움이 그런 점을 충분히 대신하고도 남았다. 

 

새 하얀 눈과 붉고 고운 꽃의 물결 속.

어느 누구보다도 곱고 아름답게 빛나며 언제 봐도 어여쁜 그 얼굴로 자신을 바라 봐주고 있는 즈한의 모습에.

모든 걱정과 사고가 비로소 갈무리되었다.

그래, 이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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